성읍 마을을 지나며 (Passing through Seongeup Village)

말의 선량한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바람이 불어오는 쪽의 가난한 저녁을 알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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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가 없었으면 없었을 (Without the Body, Wouldn’t Have Existed)

매독 앓던 훈련병 맨머리처럼
희끗희끗 눈발 스쳐간 산들,
늙은 소나무 가지에서 눈 뭉텅이
떨어져 흰 떡가루 사철나무 붉은
열매를 덮고, 쌓인 눈 위에 밀린
오줌 누고 나면 순무처럼 굵게
패이는 구멍, 생각나는가 목에 뚫린
구멍으로 더운 피 쏟던 잔칫날 돼지
오, 육체가 없었으면 없었을 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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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A Flower, in Yesterday’s Sky)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있지 않다
사람이 사랑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다

목 좁은 꽃병에
간신히 끼여 들어온 꽃대궁이
바닥의 퀘퀘한 냄새 속에 시들어가고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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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니는 말 (Floating Words)

말들은 떠다닌다. 거리 사이로, 건물 사이로, 다리 사이로, 떠다니는 말 속에는 전처의 소식도 있고, 모르는 꽃의 꽃말도 있다, 창밖에는 흰개미들이 풍경에서 풍경으로 옮겨 다니며, 원근법을 갉아먹고 있다, 언제부턴가 내가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그림은 찢어진다, 나를 구원해주던 그 풍경들은 다 어디로 갔나, 60년대 이후, 신은 죽은 척 하고 있다, 60년대 이후, 스트레스는 디오니소스나 제우스 같은 스,자 돌림 신의 반열에 올랐다, 이제 그 어떤 예언도 심장을 설레게 하지 않는다, 이혼을 했으나 아직 더 할 이혼이 많다, 하루하루가 격세지감이다, 천변만화 피크닉이다, 김밥을 말았는데, 불끈, 분노 때문에 주먹밥이 된다, 무섭다, 객관적이라는 말은 모든 말의 적이다, 떠다니는 말 몇 개를 잘 이어 붙이면 딴 세상 여는 열쇠가 된다, 그래도 구원은 없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어떤 신은 최근 요리사 자격증을 땄다, 온종일 동파육을 만들고, 다 이루었도다, 거 참 보기 좋다, 그러고 지낸다, 말들은 떠다닌다, 모든 틈새로, 간극으로, 미끄러지듯, 유영하며, 떠다니는 말꼬리나 붙잡고, 나는 사람들 앞에서 자주 운다, 처음에는 한두 명 이더니, 이제는 열 명, 스무 명 앞에서도 잘 운다, 최고 기록 백 명이 목표다, 그 중에 한 여자가 나를 꼭 안아주리라, 나는 그녀와 사랑하고, 섹스하고, 결혼하고, 이혼하리라, 오랜 세월 간직한 일기장을 털면, 책장 사이에서 빠져 나온, 무수하고 미세하고 사소한 말들이, 허공에 두둥실, 두리둥실, 구원 없는 아름다움 앞에서 나는 오늘도, 속절없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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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맛있다 (The World is Delicious)

그가 자신에 대해서만 노래하고 있는 동안
그렇게 집중하고 있는 동안 나는
아주 먼 산책을 다녀왔다
후유증이 심각하다
마모되고 있는 세계의 凹凸이 서글펐다
세계가 망해가고 있는 것은 외로운 날씨
순전히
체온이 결여된 기온 탓이므로

그는 이제 위선자가 되었다
풍경을 대할 때 제 삼자인 양한다 그러나
풍경은 생명이 있을 때만 움직인다
그 외에는 기껏해야 흔들릴 뿐
하나의 생명이 그를 향해 다가올 때
그는 당황해할 것이다 두려워할 것이다
바보처럼 바아아아보처럼

내가 한 때 존경해마지 않았던 그
내가 선물론 들고 온 생일 케이크 앞에서
눈을 사시로 뜨고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세계입니다! 세계가 먼저입니다!
내가 소리치자 그가 케이크 한 조각을 집어
내게 힘껏 던진다
내가 그것을 세계의 운동의 일부라고

생각할 때
내 얼굴을 덮치는 부드러운 凹凸
박살 난 케이크도 케이크다
참 달다
세계의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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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생일 (Happy Birthday)

이목구비는 대부분의 시간을 제멋대로 존재하다가
오늘은 나를 위해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렇지만 나는 정돈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나는 내가 되어가고
나는 나를
좋아하고 싶어지지만
이런 어색한 시간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점점 갓 지은 밥 냄새에 미쳐간다.

내 삶은 나보다 오래 지속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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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 (Thinking of an Unending Thing)

누군가의 꿈속에서 나는 매일 죽는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있는
얼음의 공포

물고기 알처럼 섬세하게
움직이는 이야기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열거하지 못한다

몇 번씩 얼굴을 바꾸며
내가 속한 시간과
나를 벗어난 시간을
생각한다

누군가의 꿈을 대신 꾸며
누군가의 웃음을
대신 웃으며

나는 낯선 공기이거나
때로는 실물에 대한 기억

나는 피를 흘리고

나는 인간이 되어가는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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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The Wind’s Millionth Set of Molars)

나는 천년을 묵었다 그러나 여우의 아홉 꼬리도 이무기의 검은 날개도 달지 못했다
천년의 혀는 돌이 되었다 그러므로

탑을 말하는 일은 탑을 세우는 일보다 딱딱하다

다만 돌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
비린 지느러미가 캄캄한 탑신을 돌아 젖은 아가미 치통처럼 끔뻑일 때

숨은 별밭을 지나며 바람은 묵은 이빨을 쏟아내린다
잠시 구름을 입었다 벗은 것처럼
허공의 연못인 탑의 골짜기

대가 자랐다 바람의 이빨자국이다
새가 앉았다 바람의 이빨자국이다

천년은 가지 않고 묵는 것이나 옛 명부전 해 비치는 초석 이마가 물속인 듯 어른거릴 때
목탁의 둥근 입질로 저무는 저녁을

한 번의 부름으로 어둡고 싶었으나
중의 목청은 남지 않았다 염불은 돌의 어장에 뿌려지는 유일한 사료이므로

치통 속에는 물을 잃은 물고기가 파닥인다

허공을 쳐 연못을 판 탑의 골짜기
나는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에 물려 있다 천년의 꼬리로 휘어지고 천년의 날개로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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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등본 (Certified Copy of Reed)

무너진 그늘이 건너가는 염부 너머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있다
언젠가는 소금이 雪山처럼 일어서던 들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

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 나는 그들이 통증처럼 뱉어내는 새떼를 보았다 먼 허공에 부러진 촉 끝처럼 박혀 있었다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싶은 날은 갔다 모든 謀議가 한 잎 석양빛을 거느렸으니

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家長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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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They Said Not a Word)

어둠에 깔린 가리봉 오거리
버스 정류장 앞 꽉 막힌 도로에
12인승 봉고차 한대가 와 선다
날일 마친 용역잡부들이 빼곡히 앉아
닭장차 안 죄수들처럼
무표정하게 창밖을 보고 있다

셋 앉는 좌석에 다섯씩 앉고
엔진룸 위에 한 줄이 더 앉았다
육십이 훨 넘은 노인네부터
서른 초반의 사내
이국의 푸른 눈동자까지
한결같이 머리칼이 누렇게 새었다

어떤 빼어난 은유와 상징으로도
그들을 그릴 수가 없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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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오지 않은 말들 (Words Not Yet Arrived)

언제부터인가
있는 말보다
없는 말을 꿈꾼다

금세 가족이 되어 동화되는 말들은
그 말들이 아니다 그의 말들은
닮기 위해 오지 않고
설명하기 위해 오지 않는다

나는 이 말들의 음역이
좀체 떠오르지 않아
많은 날을 벙어리처럼 침묵해야 했다
때론 벽을 쿵쿵 울려보기도 했다

나는 오늘도 이 말들을 찾아
거리를 헤맨다 아귀처럼
어느 길목에서 그 말들이
내 몸을 삼킬 수도 있다
나는 전혀 다른 목숨으로 그 말들을
토해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 말들은 뼈를 토해놓고
이것이 말이다라고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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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서 쉬다 1 (Taking a Rest at a Park 1)

나는 본다 들여다볼 수 없이 깊은 연못을, 노파들이 오래 된 도시의 주름 속에서 느릿느릿 새어나오는 광경을…… 살아 있는 건 무채색의 어둠뿐이라는 듯이 끔찍하게 늙은 검은 얼굴들을 보았다 죽은 나무와 밑동에 돋아나는 버섯과 잎 끝에 떨어질 듯 말 듯 매달린 물방울의, 그 휘황한 불꽃의 주인인 그녀들을……

그녀들은 어떻게 알고 서로 모이는가 그들끼리 있을 때만은 왜 쉴새없이 입이 벌어지는가 어둠에 긁힌 듯한 웃음 소리를 자랑스레 내는가 테가 닳은 억양이 서로를 감싸주는 친밀한 분위기 때문인가 낡은 벤치들 눈을 굴리며 거들먹거리는 비둘기의 전리품들 깊은 칼집과 사라진 밀어들 어떤 밤의 흔적도 남지 않은 구멍이 사라진 악기들……

그런데 왜 저들은 나에게 매혹적인가 어스름을 빨아들여 털 하나하나가 광휘를 뿜어내는 저녁의 고양이를 만난 것 같은가

나는 이 도시에서 얼마나 오래 살았던가 향로인 양 주둥이를 내미는 꽃과 상스러운 허리를 뒤트는 몸짓과 교만한 눈빛, 천박한 체위를 강요하는 들끓는 욕망과 왼손으로 써내려간 문장처럼 떠 있는 구름과 말없이 사라지는 불꽃들을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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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 이야기하련다 (Now I Will Talk of Extinction)

어둠을 겹쳐 입고 날이 빠르게 어두워진다
가지 속에 웅크리고 있던 물방울이 흘러나와 더 자라지 않는,
고목나무 살갗에 여기저기 추억의 옹이를 만들어내는 시간
서로의 체온이 남아 있는 걸 확인하며
잎들이 무섭게 살아 있었다

천변의 소똥 냄새 맡으며 순한 눈빛이 떠도는 개가
어슬렁 어슬렁 낮아지는 저녁해에 나를 넣고
키 큰 옥수수밭 쪽으로 사라져간다
퇴근하는 한 떼의 방위병이 부르는 군가 소리에 맞춰
피멍울진 기억들을 잎으로 내민 사람을 닮은 풀들
낮게 어스름에 잠겨갈 때,

손자를 업고 나온 천변의 노인이 달걀 껍질을 벗기어
먹여주는 갈퀴 같은 손끝이 두꺼운 마음을 조금씩 희고
부드러운 속살로 바꿔준다 저녁 공기에 익숙해질 때,
사람과 친해진다는 것은 서로가 내뿜는 숨결로
호흡을 나누는 일 나는 기다려본다

이제 사물의 말꼬리가 자꾸만 흐려져간다
이 세계는 잠깐 저음의 음계로 떠는 사물들로 가득 찬다
저녁의 희디흰 손가락들이 연주하는 강물로
미세한 추억을 나르는 모래들은 이 밤에 사구를 하나 만들 것이다

지붕에 널어 말린 생선들이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전혀 다른 말을 하기 시작하고,
熔岩처럼 흘러다니는 꿈들
점점 깊어지는 하늘의 상처 속에서 터져나온다
흉터로 굳은 자리, 새로운 별빛이 태어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허름한 가슴의 세간살이를 꺼내어 이제 저문 강물에 다 떠나보내련다
순한 개가 나의 육신을 남겨놓고 눈 속에 넣고 간
나를, 수천만 개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담고 있는
멀리 키 큰 옥수수밭이 서서히 눈꺼풀을 내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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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은 생각 (Too Late Thought)

꽃의 색과 향기와 새들의
목도
가장 배고픈 순간에 트인다는 것
밥벌이라는 것

허공에 번지기 시작한
색과
향기와 새소리를 들이켜다 보면
견딜 수 없이 배고파지는 것
영혼의
숟가락질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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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변상련의 (Of Sympathy)

거주 만료된 몸을 나와
저세상으로
가던 길목에서 문득 희로애락을 끌고
평생 수고해준
제 몸을
한 번 더 보고 싶어진 영혼처럼
그녀

차를 돌려 살던 집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숟가락 소리 웃음소리 서류와 옷
가구와 상처와 추억이
집을
빠져나가니 싸늘히 식어버렸구나!

무릎을 꿇고 함께 견딘 시간들을 주물렀다

인고호흡까지 시켰다 입을 달싹거리며
알은체하자 그녀

노잣돈 건네듯 움트는 동녘 햇살을 혀끝으로
떼어 덮어주었다
설익은 밥

높고 외롭고 쓸쓸한 정신을
흉내만 낸
나의 밥을
오랜 세월 맛있게 먹어준
집에게
큰절하며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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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 순간 (A Decisive Moment)

일찍이 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법이나 빗줄기에 소리를 내는 법, 그리고 가을 햇빛에 아름답게 물드는 법에 대해 배워왔다 하지만 이파리의 일생이 어떻게 완성되는가는 낙법에 달려 있다 어디에 떨어지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땅에 떨어졌다고 해도 잎이 아닌 것은 아니다 바람에 불려 다니는 것처럼 보여도 우연에 몸을 맡기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적어도 수십 마일 이상 날아가 고요히 내려앉는 법을 알고 있다 그러려면 우선 바람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바람이 몸을 들어올리는 순간 바람의 용적과 회전속도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팔랑팔랑 허공을 떠돌다 강물 위에 내려앉는 낙엽을 본 적이 있는가 그 마지막 한마디를 위해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모른다 한 방울의 비가 물위에 희미한 파문을 일으키거나 별똥별이 하늘에 성호를 긋고 사라지는 것도 다르지 않다 죽음이 입을 열어 하나의 몸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 순간이 중요하다 사진을 찍을 때 피사체와 빛이 절묘하게 만나는 순간을 포착해야 하듯이 결정적 순간이라는 게 있다 잎맥을 따라 흐르던 물기가 한 꼭짓점에서 일제히 끊어지는 순간, 단호하면서도 부드럽게 제 발목을 내리쳐야 한다 그러면 짧으면서도 아주 긴 순간 한 생애가 눈앞을 스쳐갈 것이다 벌써 절반이 넘는 이파리들이 나무를 떠났다 그들은 떨어진 게 아니라 날아간 것이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풍경처럼 보여도 이파리에게는 오직 한 순간이 주어질 뿐이다 허공에 묘비명을 쓰며 날아오르는 한 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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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 관한 기억 (Memories of a Wood)

너는 어떻게 내게 왔던가?
오기는 왔던가?
마른 흙을 일으키는 빗방울처럼?
빗물 고인 웅덩이처럼?
젖은 나비 날개처럼?
숲을 향해 너와 나란히 걸었던가?
꽃그늘에서 입을 맞추었던가?
우리의 열기로 숲은 좀더 붉어졌던가?
그때 너는 들었는지?
수천 마리 벌들이 일제히 날개 터는 소리를?
그 황홀한 소음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사랑은 소음이라고?
네가 웃으며 그렇게 말했던가?
정말 그 숲이 있기는 있었던가?

그런데 웅웅거리던 벌들은 다 어디로 갔지?
꽃들은, 너는, 어디에 있지?
나는 아직 나에게 돌아오지 못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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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First)

내가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당신의 첫,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그건 내가 모르지.
  당신의 잠든 얼굴 속에서 슬며시 스며 나오는 당신의 첫.
  당신이 여기 올 때 거기에서 가져온 것.
  나는 당신의 첫을 끊어버리고 싶어.
  나는 당신의 얼굴, 그 속의 무엇을 질투하지?
  무엇이 무엇인데? 그건 나도 모르지.
  아마도 당신을 만든 당신 어머니의 첫 젖 같은 것.
  그런 성분으로 만들어진 당신의 첫.

  당신은 사진첩을 열고 당신의 첫을 본다. 아마도 사진 속 첫이 당신을 생각한다. 생각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사랑하는 첫은 사진 속에 숨어 있는데, 당신의 손목은 이제 컴퓨터 자판의 벌판 위로 기차를 띄우고 첫, 첫, 첫, 첫, 기차의 칸칸을 더듬는다. 당신의 첫. 어디에 숨어 있을까? 그 옛날 당신 몸속으로 뿜어지던 엄마 젖으로 만든 수증기처럼 수줍고 더운 첫. 뭉클뭉클 전율하며 당신 몸이 되던 첫. 첫을 만난 당신에겐 노을 속으로 기러기 떼 지나갈 때 같은 간지러움. 지금 당신이 나에게 작별의 편지를 쓰고 있으므로, 당신의 첫은 살며시 웃고 있을까? 사진 속에서 더 열심히 당신을 생각하고 있을까? 엄마 뱃속에 몸을 웅크리고 매달려 가던 당신의 무서운 첫 고독이여. 그 고독을 나누어 먹던 첫사랑이여. 세상의 모든 첫 가슴엔 칼이 들어 있다. 첫처럼 매정한 것이 또 있을까. 첫은 항상 잘라버린다. 첫은 항상 죽는다. 첫이라고 부르는 순간 죽는다. 첫이 끊고 달아난 당신의 입술 한 점. 첫. 첫. 첫. 첫. 자판의 레일 위를 몸도 없이 혼자 달려가는 당신의 손목 두개, 당신의 첫과 당신. 뿌연 달밤에 모가지가 두 개인 개 한 마리가 울부짖으며, 달려가며 찾고 있는 것. 잊어버린 줄도 모르면서 잊어버린 것. 죽었다. 당신의 첫은 죽었다. 당신의 관자놀이에 아직도 파닥이는 첫.
 
  당신의 첫, 나의 첫,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첫.
  오늘 밤 처음 만난 것처럼 당신에게 다가가서
  나는 첫을 잃었어요 당신도 그런가요 그럼 손 잡고 뽀뽀라도?
  그렇게 말할까요?
 
  그리고 그때 당신의 첫은 끝, 꽃, 꺼억.
  죽었다, 주 긋 다. 주깄다.
  그렇게 말해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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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코라 (Seoul, Kora*)

山이 컹컹 짖다가
 山이 나를 따라온다
 
  山이 새끼를 낳는다
  山이 산을 핧는다
  山이 새끼들에게 젖을 물린다
  山이 매정하게 새끼들을 다 버린다
  어린 山들이 백주 대낮에 교미한다, 악취가 난다
  山이 미로 속의 개떼처럼 몰려다닌다
 
  山이 젖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목덜미를 쓰다듬자 몸을 부르르 떤다
  목덜미에 줄이 묶인 山이 끌려간다
  山이 철창 속에 갇힌다. 맞는다. 걷어채인다. 죽는다
 
  山이 똥을 먹는다, 시신을 먹는다
  山이, 욕창 가득한 山이 눈에 불을 켜고 달겨든다
  山이, 머리에 흰 눈을 얹은 山이 운다
  나무 한 그루 없는 山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히고 목놓아 운다
  山이 山을 물어뜯고 싸운다
  山이, 큰 山이 제 꼬리를 물고 빙빙 돈다
 
  몰려다니는 山을 제국의 군대가 박멸한다
  살아남은 山이, 山이, 山이 山을 넘어 달아난다
  아직도 달아난다
 
山이, 山을 벗어버리고 싶은 山이, 두 손을 모으고, 모은 두 손을 저 먼 山을 향해 뻗치더니 이마에 대고, 가슴으로 끌어내리고, 다시 한 번 저 먼 山을 바라보고 팔꿈치를 옆구리에 붙인 다음, 오른쪽 무릎을 꿇고, 양손을 땅바닥에 대더니, 왼쪽 무릎을 마저 꿇고, 모은 두 손을 땅바닥에 붙여 힘껏 멀리 밀어 보낸 다음, 온 몸을 땅에 밀착시킨다. 그리고 운다. 이것을 세 걸음에 한 번씩 계속 반복하면서, 山이 山을 돈다.

註) 코라*: 오체투지로 성산을 한 바퀴 도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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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A Table)

우리는 문제를 열고
대화에 푹 빠진다
사랑에도 빠지고
우울증에서 벗어난다

어디라도 좋다 각자의 입장에서
우리들의 의견은 모인다
반경 1km 이내

거기 있다고 생각되는
당신의 상상은
깊이깊이 다른 건물을 쌓아 올린다

사이좋게 평행선을 만든다
우리 관계는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서로의 인력에 끌린다

지하 깊은 곳에서
비밀이 고갈되는 순간
당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의 손가락은 누구를 지칭하는가

폭넓은 의견과 차이를 교환한다
당신의 말은 여기까지
내가 생각하는 건물의 높이는
저기까지

수위를 조절해가며
푹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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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자 (Let’s Write a Novel)

너무 긴 소설을 쓰지 말 것. 너무 짧은 소설도 쓰지 말 것. 적당하게 지루해질 때 끝나는 소설일 것. 원고지의 분량이 아니라 심리적인 분량일 것. 어느 공간에서 읽어도 적당히 심심하고 적당히 어리둥절한 반전일 것.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충실하지 않는 이야기일 것. 어떤 대답도 흘려 들을 수 있는 내면일 것. 그런 주인공을 찾을 것. 캐스팅은 길거리에서 오디션은 실내에서 시상식은 레드카펫을 밟는 장면에서 중단할 것. 더 많은 말이 필요하면 다른 영화를 찍을 것. 더 많은 상이 필요하면 영화를 찍지 말 것. 돌아와서 시를 쓸 것. 전혀 시적이지 않는 소설을 쓸 것. 있어도 상관없고 없어도 상관없는 중요한 문장이 들어갈 것. 단어는 조금 더 동원되거나 외로워질 것. 저 혼자 있어도 눈물을 뚝뚝 흘리는 마침표일 것. 다른 부호는 적당히 경멸하고 적당히 술을 마신 후 같이 잘 것. 좋았니? 좋았어! 이런 대화에 식상해하는 커플이 데이트하기 좋은 장소를 섭외할 것. 침대가 아니면 어디가 좋을까? 화장실이 아니면 어디서 바지를 내리고 치마를 들추고 속옷을 다시 껴입는지 고민하지 말 것. 사람이 장소를 만들어 간다. 장소가 사람을 대신한다. 공간은 사람 안에 들어왔다가 서서히 말라 갈 것. 물기가 다 빠진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간직한 로맨스 가이를 이해하고 두둔하고 적당히 멀리할 것. 감정의 폭이 자주 변하는 남자의 내면을 한 단어로 붙잡아 둘 것. 병원이거나 요양원이거나 아니면 수용소에서 만난 사람들의 일상적인 머리 모양일 것. 그들은 많은 충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런 충고를 적절히 섞어서 거절할 것. 외판원에게는 외판원에게 어울리는 약점을 만들어서 반창고에 붙여 줄 것. 쉴 새 없이 나온다면 항문에 붙여 줄 것. 기침이 심하다면 기침을 섞어 가며 장면을 바꿀 것. 더 건조한 날씨로. 더 지저분한 얼굴로 손을 씻고 나오는 결말에 가서야 나의 결벽증이 드러나는 캐릭터를 완성하고 조금 더 방치할 것. 미완성된 소설의 다음 소설을 구상할 것. 초심으로 돌아가서 길을 잃을 것. 아니면 골목길. 아니면 빙판길에서 씽씽 달리는 자전거를 기차처럼 묘사하고 정거장처럼 그리워하고 이별처럼 뻔한 동기 유발을 의심할 것. 그 전에 먼저 발표할 것. 책을 내고 출판 기념회에 온 하객들에게 왜 왔는지 모를 초청장을 발송할 것. 발송과 동시에 소설을 시작할 것. 영화의 결말도 거기서 시작하고 거기서 끝날 것. 엉성한 짜임새의 스토리를 누구보다 경멸하고 오해하는 친구의 아버지가 될 것. 그 친구의 친구와 적당히 말을 트고 화해할 것. 자연스럽게 오해하는 장면을 곁들일 것. 주먹다짐은 불필요하겠지만 오래 끌지 말 것. 너무 극적이니까 분량을 다시 생각할 것. 다음 소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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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해지는 육체 (Body Becoming Transparent)

月,
장을 보러 나갔다
자르지 않은 기장미역을 사 와서 찬물에 담갔다
베란다에선 파꽃이 피었고
달팽이는 그 위에 둥글게 앉아 있었다

火,
차마 깨우지 못했다
똬리를 틀고 잠든 나의 테두리를
동그랗게 에워싸며
조용히 다가가
다시 누웠다

水,
당신은 기차를 탔다 덜컹이기 위해서
창문에 이마를 대고 매몰차게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기 위해서
나는 옥상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 있었다
눈을 감고 귀를 깃발처럼 높이 매달았다
여린 기차 소리가 들렸다

木,
사랑을 호명할 때 우리는 거기에 없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뿔달린 짐승이 되어 있었다
당신의 두려움과 나의 두려움 사이에서
검은 피가 흘렀다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들이 응혈처럼 만져졌다

金,
내가 집을 비운 사이 당신은
혼자 힘으로 여러 번 죽고 여러 번 다시 태어났다
꽃들도 여러 번 피었다 졌다
당신이 서성인 발자국들이 마룻바닥에 흥건했다
무수히 겹쳐 있어 수많은 사람이
다녀간 흔적과도 같았다
밥냄새 꽃 냄새 빨래 냄새가
지독하게 흥건했다
치르치르와 미치르가 돌아온 집도 이랬을 거야
우리는 빨래를 개며 말했다

土,
우리라는 자명한 실패를 당신은 사랑이라 호명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돌아서서 모독이라 다시 불렀다 세상 모든 몹쓸 것들이 쓸모를 다해 다감함을 부른다 당신의 다정함은 귓바퀴를 돌다 몸 안으로 흘러들고 나는 파먹히기를 바란다고 일기에 쓴다 파먹히는 통증 따윈 없을 거라 적는다 일기장을 펼칠 때마다 일생 동안 지었던 죄들이 책상 위에




쏟아져 내렸다

日,
우리는 주고받은 편지들을 접어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양 날개에 빼곡했던 글자들이 첫눈처럼 흩날려 떨어졌다

다시 月,
당신은 장을 보러 나간다
당신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현관문 바깥쪽에 등을 기댄 채
입을 틀어막고 한잠을 울다 들어올 수도 있다
어쨌거나 파꽃은 피고
달팽이도 제 눈물로 점액질을 만들어
따갑고 둥근 파꽃의 표면을
일보 일보 가고 있다
냉장고처럼 나는 단정하게 서서
속엣것들이 환해지고 서늘해지길
기다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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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에 대한 해석 (Interpretation of Solitude)

구석기 시대 활을 처음 발명한 자는
한밤중 고양이가 등을 곧추세우는 걸
유심히 보아두었을지 모른다

저 미지를 향해
척추에 꽂아둔 공포를 힘껏 쏘아올리는
직선의 힘을

가진 적이 많아서
잃어버린 것투성이인 울음이
가진 적이 없어서
잃어버린 것투성이인 것만 같은 울음에게
활을 겨누던 시간들이
흐른 후

19세기 베를린에 살던
부슈만 씨도
한참이나 관찰했으리라

기지개를 쫘악 펴고 일어난 길고양이는
일평생 척추에 심어준 상처로 성대가 트인다는 것을

버림받은 이가 버림받은 이에게
마음 여린 이가 마음 여린 이에게 내밀었던
덥썩덥썩 잡았던 손목들이
싹둑싹둑 잘려나갈 때

세상 만물이 궁수처럼 흔들림이 없고
사방 천지가 온통 과녁뿐이란 사실이
단지 참혹했을 때

그는 집에 돌아와
울음이 그칠 때까지 주름상자를 접고 접어
오로지 탄식만으로 발성하는
아코디언을 발명하게 되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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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식사 (A Clean Meal)

어떤 이는 눈망울이 있는 것들 차마 먹을 수 없어 채식주의자 되었다는데 내 접시 위의 풀들 깊고 말간 천 개의 눈망울로 빤히 나를 쳐다보기 일쑤, 이 고요한 사냥감들에도 핏물 자박거리고 꿈틀거리며 욕망하던 뒤안 있으니 내 앉은 접시나 그들 앉은 접시나 매일반. 천년 전이나 만년 전이나 생식을 할 때나 화식을 할 때나 육식이나 채식이나 매일반.

문제는 내가 떨림을 잃어간다는 것인데, 일테면 만년 전의 내 할아버지가 알락꼬리암사슴의 목을 돌도끼로 내려치기 전, 두렵고 고마운 마음으로 울리던 기도가 지금 내게 없고 (시장에도 없고) 내 할머니들이 돌칼로 어린 죽순 밑둥을 끊어내는 순간, 고맙고 미안해하던 마음의 떨림이 없고 (상품과 화폐만 있고) 사뭇 괴로운 포즈만 남았다는 것.

내 몸에 무언가 공급하기 위해 나 아닌 것의 숨을 끊을 때 머리 가죽부터 한 터럭 뿌리까지 남김없이 고맙게, 두렵게 잡숫는 법을 잃었으니 이제 참으로 두려운 것은 내 올라앉은 육중한 접시가 언제쯤 깨끗하게 비워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 도대체 이 무거운, 토막 난 몸을 끌고 어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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