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n-Gwi Chung



서른 살 (Thirty Years Old)

어두운 복도 끝에서 괘종시계 치는 소리 1시와 2시 사이에도 11시와 12시 사이에도 똑같이 한 번만 울리는 것 그것은 뜻하지 않은 환기, 소득 없는 각성 몇 시와 몇 시의 중간 지대를 지나고 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단지 무언가의 절반만큼 네가 왔다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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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산 (Born in the 1970s)

우리는 목숨을 걸고 쓴다지만 우리에게 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다 그것이 비극이다 세상을 허리 위 분홍 훌라후프처럼 돌리면서 밥 먹고 술 마시고 내내 기다리다 결국 서로 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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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가 없었으면 없었을 (Without the Body, Wouldn’t Have Existed)

매독 앓던 훈련병 맨머리처럼 희끗희끗 눈발 스쳐간 산들, 늙은 소나무 가지에서 눈 뭉텅이 떨어져 흰 떡가루 사철나무 붉은 열매를 덮고, 쌓인 눈 위에 밀린 오줌 누고 나면 순무처럼 굵게 패이는 구멍, 생각나는가 목에 뚫린 구멍으로 더운 피 쏟던 잔칫날 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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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A Flower, in Yesterday’s Sky)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있지 않다 사람이 사랑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다 목 좁은 꽃병에 간신히 끼여 들어온 꽃대궁이 바닥의 퀘퀘한 냄새 속에 시들어가고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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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니는 말 (Floating Words)

말들은 떠다닌다. 거리 사이로, 건물 사이로, 다리 사이로, 떠다니는 말 속에는 전처의 소식도 있고, 모르는 꽃의 꽃말도 있다, 창밖에는 흰개미들이 풍경에서 풍경으로 옮겨 다니며, 원근법을 갉아먹고 있다, 언제부턴가 내가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그림은 찢어진다, 나를 구원해주던 그 풍경들은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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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맛있다 (The World is Delicious)

그가 자신에 대해서만 노래하고 있는 동안 그렇게 집중하고 있는 동안 나는 아주 먼 산책을 다녀왔다 후유증이 심각하다 마모되고 있는 세계의 凹凸이 서글펐다 세계가 망해가고 있는 것은 외로운 날씨 순전히 체온이 결여된 기온 탓이므로 그는 이제 위선자가 되었다 풍경을 대할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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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생일 (Happy Birthday)

이목구비는 대부분의 시간을 제멋대로 존재하다가 오늘은 나를 위해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렇지만 나는 정돈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나는 내가 되어가고 나는 나를 좋아하고 싶어지지만 이런 어색한 시간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점점 갓 지은 밥 냄새에 미쳐간다. 내 삶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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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 (Thinking of an Unending Thing)

누군가의 꿈속에서 나는 매일 죽는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있는 얼음의 공포 물고기 알처럼 섬세하게 움직이는 이야기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열거하지 못한다 몇 번씩 얼굴을 바꾸며 내가 속한 시간과 나를 벗어난 시간을 생각한다 누군가의 꿈을 대신 꾸며 누군가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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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They Said Not a Word)

어둠에 깔린 가리봉 오거리 버스 정류장 앞 꽉 막힌 도로에 12인승 봉고차 한대가 와 선다 날일 마친 용역잡부들이 빼곡히 앉아 닭장차 안 죄수들처럼 무표정하게 창밖을 보고 있다 셋 앉는 좌석에 다섯씩 앉고 엔진룸 위에 한 줄이 더 앉았다 육십이 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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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오지 않은 말들 (Words Not Yet Arrived)

언제부터인가 있는 말보다 없는 말을 꿈꾼다 금세 가족이 되어 동화되는 말들은 그 말들이 아니다 그의 말들은 닮기 위해 오지 않고 설명하기 위해 오지 않는다 나는 이 말들의 음역이 좀체 떠오르지 않아 많은 날을 벙어리처럼 침묵해야 했다 때론 벽을 쿵쿵 울려보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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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은 생각 (Too Late Thought)

꽃의 색과 향기와 새들의 목도 가장 배고픈 순간에 트인다는 것 밥벌이라는 것 허공에 번지기 시작한 색과 향기와 새소리를 들이켜다 보면 견딜 수 없이 배고파지는 것 영혼의 숟가락질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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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변상련의 (Of Sympathy)

거주 만료된 몸을 나와 저세상으로 가던 길목에서 문득 희로애락을 끌고 평생 수고해준 제 몸을 한 번 더 보고 싶어진 영혼처럼 그녀 차를 돌려 살던 집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숟가락 소리 웃음소리 서류와 옷 가구와 상처와 추억이 집을 빠져나가니 싸늘히 식어버렸구나! 무릎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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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 순간 (A Decisive Moment)

일찍이 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법이나 빗줄기에 소리를 내는 법, 그리고 가을 햇빛에 아름답게 물드는 법에 대해 배워왔다 하지만 이파리의 일생이 어떻게 완성되는가는 낙법에 달려 있다 어디에 떨어지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땅에 떨어졌다고 해도 잎이 아닌 것은 아니다 바람에 불려 다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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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First)

내가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당신의 첫,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그건 내가 모르지.   당신의 잠든 얼굴 속에서 슬며시 스며 나오는 당신의 첫.   당신이 여기 올 때 거기에서 가져온 것.   나는 당신의 첫을 끊어버리고 싶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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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코라 (Seoul, Kora*)

山이 컹컹 짖다가  山이 나를 따라온다     山이 새끼를 낳는다   山이 산을 핧는다   山이 새끼들에게 젖을 물린다   山이 매정하게 새끼들을 다 버린다   어린 山들이 백주 대낮에 교미한다, 악취가 난다   山이 미로 속의 개떼처럼 몰려다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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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A Table)

우리는 문제를 열고 대화에 푹 빠진다 사랑에도 빠지고 우울증에서 벗어난다 어디라도 좋다 각자의 입장에서 우리들의 의견은 모인다 반경 1km 이내 거기 있다고 생각되는 당신의 상상은 깊이깊이 다른 건물을 쌓아 올린다 사이좋게 평행선을 만든다 우리 관계는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서로의 인력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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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자 (Let’s Write a Novel)

너무 긴 소설을 쓰지 말 것. 너무 짧은 소설도 쓰지 말 것. 적당하게 지루해질 때 끝나는 소설일 것. 원고지의 분량이 아니라 심리적인 분량일 것. 어느 공간에서 읽어도 적당히 심심하고 적당히 어리둥절한 반전일 것.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충실하지 않는 이야기일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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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해지는 육체 (Body Becoming Transparent)

月, 장을 보러 나갔다 자르지 않은 기장미역을 사 와서 찬물에 담갔다 베란다에선 파꽃이 피었고 달팽이는 그 위에 둥글게 앉아 있었다 火, 차마 깨우지 못했다 똬리를 틀고 잠든 나의 테두리를 동그랗게 에워싸며 조용히 다가가 다시 누웠다 水, 당신은 기차를 탔다 덜컹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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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에 대한 해석 (Interpretation of Solitude)

구석기 시대 활을 처음 발명한 자는 한밤중 고양이가 등을 곧추세우는 걸 유심히 보아두었을지 모른다 저 미지를 향해 척추에 꽂아둔 공포를 힘껏 쏘아올리는 직선의 힘을 가진 적이 많아서 잃어버린 것투성이인 울음이 가진 적이 없어서 잃어버린 것투성이인 것만 같은 울음에게 활을 겨누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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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식사 (A Clean Meal)

어떤 이는 눈망울이 있는 것들 차마 먹을 수 없어 채식주의자 되었다는데 내 접시 위의 풀들 깊고 말간 천 개의 눈망울로 빤히 나를 쳐다보기 일쑤, 이 고요한 사냥감들에도 핏물 자박거리고 꿈틀거리며 욕망하던 뒤안 있으니 내 앉은 접시나 그들 앉은 접시나 매일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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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나무 (A Flower Tree)

꽃이 지고 누운 꽃은 말이 없고 딱 한 마리 멧새가 몸을 튕겨가는 딱 그만한 천지 하늘 겹겹 분분하다 낮눈처럼 그렇게 꽃이 눕고 누운 꽃이 일생에 단 한 번 자기의 밑을 올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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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귀 (餓鬼, A Starving Ghost)

길에누워자는사람들은밤에자신도모르는사이옆으로와서누워자는사람에게 병을옮긴다고한다살을닿고가만히곁에누웠을뿐인데그들은자신도모르는사이 서로병을옮기고병을받으며죽어간다그들은입을다물지못하고잔다 무당은죽어서도무덤을갖지못한다는데살아서미물이었던그들은죽으면더욱 다정을앓아야한다는데자신도모르는사이그들은언제나칼날위가아닌인간위에서 가장위태로워보인다 세장을열고손가락으로죽은새의목구멍을열어본다액에젖은벌레가기어나온다 벌레가몸에묻은어둠을핥는다그건이쪽의어둠이아니어서나는무덤을갖지못한 새들의저녁을생각한다 감자탕집에서땀을뻘뻘흘리며뼈다귀를뜯어먹는데맞은쪽에서도뼈다귀를뜯고있는사람이보인다 이안(內)은우리같군창문밖엔거지하나주머니에두손을넣고이쪽을빤히바라보고있다 이봐거기는우리바깥이라구입을다물지못하고땀을뻘뻘흘리고뼈다귀를핥고빨고뜯고있는데 먼하늘로수송기한대가좆같은굉음을내며중환자처럼실려가고있다자신도모르는사이여기는 입안의초록을모두열어놓고새의입속으로들어가잠드는, 그래 다물고 감자, 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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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의 문양 (Pattern of a Knee)

저녁에 무릎, 하고 부르면 좋아진다 당신의 무릎, 나무의 무릎, 시간의 무릎 무릎은 몸의 파문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살을 맴도는 자리 같은 것이어서 저녁에 무릎을 내려놓으면 천근의 희미한 소용돌이가 몸을 돌고 돌아온다 누군가 내 무릎 위에 잠시 누워 있다가 해골이 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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