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ther Anthony of Taizé



지옥의 불길 (Flames of Hell)

‘저 난감한 지옥의 불길은 결국 가상현실의 불길이군요?’ 키보드를 두드리다 몸을 돌이키며 원효가 묻자 불타는 답했다. ‘불길이 대체 어디 있지?’ 원효가 이번엔 예수에게로 몸을 돌리자 예수가 속삭였다. ‘지옥이란 이 세상 관계들이 죄 끊겨지는 삶일세, 생각마저 하나하나 끊겨지는.’ ‘그 다음은 어떻게 됩니까?’ …

Posted in 35.2: OZ-KO (HANGUK-HOJU) | Tagged | Leave a comment

꽃의 고요 (Flower’s Silence)

일고 지는 바람 따라 청매(靑梅) 꽃잎이 눈처럼 내리다 말다 했다. 바람이 바뀌면 돌들이 드러나 생각에 잠겨 있는 흙담으로 쏠리기도 했다. ‘꽃 지는 소리가 왜 이리 고요하지?’ 꽃잎을 어깨로 맞고 있던 불타의 말에 예수가 답했다. ‘고요도 소리의 집합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는가? …

Posted in 35.2: OZ-KO (HANGUK-HOJU) | Tagged | Leave a comment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The Wind’s Millionth Set of Molars)

나는 천년을 묵었다 그러나 여우의 아홉 꼬리도 이무기의 검은 날개도 달지 못했다 천년의 혀는 돌이 되었다 그러므로 탑을 말하는 일은 탑을 세우는 일보다 딱딱하다 다만 돌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 비린 지느러미가 캄캄한 탑신을 돌아 젖은 아가미 치통처럼 끔뻑일 때 숨은 …

Posted in 35.2: OZ-KO (HANGUK-HOJU) | Tagged | Leave a comment

갈대 등본 (Certified Copy of Reed)

무너진 그늘이 건너가는 염부 너머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있다 언젠가는 소금이 雪山처럼 일어서던 들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 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 나는 그들이 통증처럼 뱉어내는 새떼를 보았다 먼 허공에 부러진 촉 끝처럼 박혀 있었다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

Posted in 35.2: OZ-KO (HANGUK-HOJU) | Tagged | Leave a comment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 이야기하련다 (Now I Will Talk of Extinction)

어둠을 겹쳐 입고 날이 빠르게 어두워진다 가지 속에 웅크리고 있던 물방울이 흘러나와 더 자라지 않는, 고목나무 살갗에 여기저기 추억의 옹이를 만들어내는 시간 서로의 체온이 남아 있는 걸 확인하며 잎들이 무섭게 살아 있었다 천변의 소똥 냄새 맡으며 순한 눈빛이 떠도는 개가 …

Posted in 35.2: OZ-KO (HANGUK-HOJU) | Tagged | Leave a comment

숲에 관한 기억 (Memories of a Wood)

너는 어떻게 내게 왔던가? 오기는 왔던가? 마른 흙을 일으키는 빗방울처럼? 빗물 고인 웅덩이처럼? 젖은 나비 날개처럼? 숲을 향해 너와 나란히 걸었던가? 꽃그늘에서 입을 맞추었던가? 우리의 열기로 숲은 좀더 붉어졌던가? 그때 너는 들었는지? 수천 마리 벌들이 일제히 날개 터는 소리를? 그 …

Posted in 35.2: OZ-KO (HANGUK-HOJU) | Tagged | Leave a comment

그를 버리다 (Leaving Him Behind)

죽은 이는 죽었으나 산 이는 또 살았으므로 불을 피운다 동짓달 한복판 잔가지는 빨리 붙어 잠깐 불타고 굵은 것은 오래 타지만 늦게 붙는다 마른 잎들은 여럿이 모여 화르르 타오르고 큰 나무는 외로이 혼자서 탄다 묵묵히 솟아오른 봉분 가슴에 박힌 못만 같아서 …

Posted in 35.2: OZ-KO (HANGUK-HOJU) | Tagged | Leave a comment

노숙 (Homeless)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 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너를 …

Posted in 35.2: OZ-KO (HANGUK-HOJU) | Tagged | Leave a comment

천지간 (Between Heaven and Earth)

저녁이 와서 하는 일이란 천지간에 어둠을 깔아 놓는 일 그걸 거두려고 이튿날의 아침 해가 솟아오르기까지 밤은 밤대로 저를 지키려고 사방을 꽉 잠가둔다 여름밤은 너무 짧아 수평선 채 잠그지 못해 두 사내가 빠져나와 한밤의 모래톱에 마주 앉았다 이봐, 할 말이 산더미처럼 …

Posted in 35.2: OZ-KO (HANGUK-HOJU) | Tagged | Leave a comment

대추나무와 사귀다 (Dating a Jujube Tree)

어떤 벌레가 어머니의 회로를 갉아먹었는지 깜박깜박 기억이 헛발을 디딜 때가 잦다 어머니는 지금 망각이라는 골목에 접어드신 것이니 반지수를 이어놓아도 엉뚱한 곳에서 살다 오신 듯 한생이 뒤죽박죽이다 생사의 길 예 있어도 분간할 수 없으니 문득 얕은 꿈에서 깨어난 오늘밤 내 잠도 …

Posted in 35.2: OZ-KO (HANGUK-HOJU) | Tagged | Leave a comment

산낙지 먹기 (Eating a Live Octopus)

한 번도 죽음을 본 일이 없었기에, 죽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기에, 죽음은 접시 위에서 살아있을 때보다 더 격렬하게 꿈지럭거렸다. 죽으면 꼼짝 않고 있어야 된다는 걸 몰랐기에, 제 힘과 독기를 모두 모아 거친 물굽이처럼 요동쳤다. 어찌나 심각하게 꿈틀거리던지, 자칫하면 죽음이 …

Posted in 35.2: OZ-KO (HANGUK-HOJU) | Tagged , | Leave a comment

회색양말 (Gray Socks)

회색 양말을 신고 나갔다가 집에 와 벗을 때 보니 색깔이 비슷한 짝짝이 양말이었다. 이젠 아무래도 좋다는 것인가. 비슷하면 무조건 똑같이 읽어버리는 눈. 작은 차이를 일일이 다 헤아려보는 것이 귀찮아 웬만한 것은 모두 하나로 묶어버리는 눈. 무차별하게 뭉뚱그려지는 숫자들 글자들 사람들 …

Posted in 35.2: OZ-KO (HANGUK-HOJU) | Tagged , |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