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은 떠나 없고 여름이 가기도 전에 황폐해버린 그 해 가을, 포도
밭 등성이로 저녁마다 한 사내의 그림자가 거대한 조명 속에서 잠깐씩
떠오르다 사라지는 풍경 속에서 내 弱視의 산책은 비롯되었네. 친구
여, 그 해 가을 내내 나는 적막과 함께 살았다. 그때 내가 데리고 있던
헛된 믿음들과 그 뒤에서 부르던 작은 충격들을 지금도 나는 기억하고
있네. 나는 그때 왜 그것을 몰랐을까. 희망도 아니었고 죽음도 아니었
어야 할 그 어둡고 가벼웠던 종교들을 나는 왜 그토록 무서워했을까.
목마른 내 발자국마다 검은 포도알들은 목적도 없이 떨어지고 그때마
다 고개를 들면 어느 틈엔가 낯선 풀잎의 자손들이 날아와 벌판 가득
흰 연기를 피워 올리는 것을 나는 한참이나 바라보곤 했네. 어둠은 언
제든지 살아 있는 것들의 그림자만 골라 디디며 포도밭 목책으로 걸어
왔고 나는 내 정신의 모두를 폐허로 만들면서 주인을 기다렸다. 그러
나 기다림이란 마치 용서와도 같아 언제나 육체를 지치게 하는 법. 하
는 수 없이 내 지친 밭을 타일러 몇 개의 움직임을 만들다 보면 버릇처
럼 이상한 무질서도 만나곤 했지만 친구여, 그때 이미 나에게는 흘릴
눈물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내 정든 포도밭에서 어느 하루 한
알 새파란 소스라침으로 떨어져 촛농처럼 누운 밤이면 어둠도, 숨죽인
희망도 내게는 너무나 거추장스러웠네. 기억한다. 그 해 가을 주인은
떠나 없고 그리움이 몇 개 그릇처럼 아무렇게나 사용될 때 나는 떨리
는 손으로 짧은 촛불들을 태우곤 했다. 그렇게 가을도 가고 몇 잎 남은
추억들마저 천천히 힘을 잃어갈 때 친구여, 나는 그때 수천의 마른 포
도 이파리가 떠내려가는 놀라운 空中을 만났다. 때가 되면 태양도 스
스로의 빛을 아껴두듯이 나 또한 내 지친 정신을 가을 속에서 동그랗
게 보호하기 시작했으니 나와 죽음은 서로를 지배하는 각자의 꿈이 되
었네. 그러나 나는 끝끝내 포도밭을 떠나지 못했다. 움직이는 것은 아
무것도 없었지만 나는 모든 것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 기척 없
이 새끼줄을 들치고 들어선 한 사내의 두려운 눈빛을 바라보면서 그가
나를 주인이라 부를 때마다 아, 나는 황망히 고개 돌려 캄캄한 눈을 감
았네. 여름이 가기도 전에 모든 이파리 땅으로 돌아간 포도밭, 참담했
던 그 해 가을, 그 빈 기쁨들을 지금 쓴다 친구여.
In autumn of that year, a year ruined even before the owner departed and summer ended, my poor-sighted walks to the back of the vineyard began amid landscapes where each evening, in the vast light, a man’s shadow flittered in and out of sight. My friend, I lived with silence the entire autumn that year. I still remember now the empty beliefs I carried with me and the small shocks that called out behind them. Why did I not know it then? Why did I fear those dark, trivial religions that were not hope and certainly not death? With each of my thirsty footprints black grape orbs dropped purposelessly, and each time I lifted my gaze I stared for a time at the progenies of strange grasses that came flying, stirring up the white smoke blanketing the fields. Darkness always singles out the shadows of living things so it can tread on them, and so it came walking to the vineyard’s wooden rail fence, where I turned my entire spirit to ruin and awaited the owner. But waiting is like forgiveness and always tires the flesh. I had no choice but to instruct my weary feet and make a few movements, and when I did I encountered various kinds of disorder, but my tears were no longer flowing. Then one day in my beloved vineyard, I fell from a bright blue orb of fright, and the evening lying like guttered wax, the darkness, the stifled hopes, all became too much for me. I remember. That autumn after the owner departed and when longing was used carelessly like so many dishes, I lit short candle flames with trembling hands. And so autumn passed, and when even memories with their few remaining leaves slowly lost their power, my friend, I came to a surprising space where thousands of grape leaves came showering down. When the time came, I too, like the sun conserving its light, began to roundly protect my weary spirit in the midst of autumn, and so death and I became our own dreams, each ruling the other. But I could never leave the vineyard. Nothing moved, but I changed everything. One day as I stared into the terrified eyes of a man who had stepped in from nowhere holding up the end of a straw rope, each time he called me the owner, ah, I turned my face away in agitation and closed my dark eyes. O friend, I write now of all the vineyards that return to leafy earth before summer passes, of the wretched autumn that year, of those empty happinesses.
English translation by Gabriel Sylvian